브라질의 역사, 식민지시대 전후 모습
오늘 글에서는 브라질의 대략적인 역사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다른 중남미 국가들과 다르게 브라질만 스페인어가 아닌 포르투갈어를 쓰는 사실 때문에 포르투갈이 브라질을 식민화했다는 것 정도는 잘 알려져 있는데, 브라질의 전반적인 역사 흐름에 대해서 아주 요약하여 설명드리겠습니다.
식민지 이전
브라질 최초의 주민은, 베링해를 건너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때문에 브라질의 인디오들을 보면 의외로 눈이 아시아인들의 눈과 닮아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들은 기원전 8000년경 브라질 지역까지 도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중미 쪽에는 마야 문명, 잉카문명, 아즈텍 문명 등의 사회가 발달하고 있었지만 브라질 인디오들은 아마존 정글에 가로막혀 그들과 거의 교류가 없었고 별도로 원시적인 농경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당시 인디오라고 불렸던 투피-과라니계 원주민들은 16세기 전반기 약 100만 명 정도가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유럽인들이 식민지 개척을 하면서 처음 브라질에 살고 있던 그들을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식민지 시대
1492년, 탐험가 콜럼버스가 최초로 아메리카 중미 부근에 도착한 이후 아메리카 대륙을 향한 식민화가 급격히 진행되었고, 1494년 스페인과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체결해 브라질령은 포르투갈로 확정되게 됩니다. 당시에는 브라질의 큰 규모를 모르는 채로 조약을 맺었으며 작은 위쪽 해안 지역만을 포르투갈이 가지게 되는 일종의 불평등한 조약이었지만 그러던 1500년 포르투갈의 탐험가 페드루 알 바르스가 브라질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때문에 브라질은 다른 남미 국가들과 달리 포르투갈의 직접 지배를 받게 되었으며 초대 브라질 총독이 살바도르에 부임하기에 이릅니다. 다만 브라질의 땅은 워낙 자원 개발이 쉽지 않았고, 북동부 전체가 열대우림으로 뒤덮여 있어 포르투갈인들은 스페인인들과 달리 적극적으로 개발 활동을 펼칠 수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파우 브라질이라고 물리는 나무에서 나오는 염료를 팔아 돈을 버는 것 정도밖에는 경제적 이득을 볼 방법이 없었는데 사탕수수로 플랜테이션 농업을 시작하면서 브라질에서 본격적인 개발과 착취가 시작됩니다. 또 해안가에서 주로 원주민들을 접했던 포르투갈인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약 17세기 즈음 브라질 내륙으로 탐험을 시작했고 거쳐가는 곳들에 많은 마을을 세우며 과라니 원주민들을 노예로 삼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18세기, 브라질 남동부에 위치한 미나스 제라이스에서 금광이 발견되면서 많은 포르투갈인들이 금을 캐 팔기 위해 식민지의 중심을 북동부 살바도르에서 남부로 이동하였고 그 때문에 18세기 리우 데 자네이루가 식민지의 수도가 되었습니다. 이 금광에 투입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흑인 노예들과 원주민들이 동원되었고 많은 이들이 고통을 받은 가운데 브라질의 혁명가, 치라덴치스는 포르투갈로부터 독립을 하기 위해 "미나스의 음모"를 꾸미기도 했습니다. 그 작전이 발각되면서 그는 처형되었지만 그 이후에도 지속적인 독립운동이 진행되었는데, 제대로 된 교육이 이루어질 수 없었던 당시 환경 탓에 이 독립운동은 거국적으로 퍼져나갈 수 없었습니다.
브라질의 독립
1807년, 나폴레옹이 이끌던 프랑스 군이 포르투갈 본토를 침공하면서 포르투갈 왕가는 브라질로 망명하여 리스본에서 리우 데 자네이루로 수도를 옮기고 본격적으로 리우를 개발하기에 이릅니다. 1821년 포르투갈 왕궁은 리스본으로 귀환했지만 섭정으로 남아있었던 황태자 페드루가 황제인 페드루 1세로 즉위하면서 브라질 제국이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했음을 선언합니다. 직후 1822년부터 25년까지 브라질 최남단에 있던 시스플라티나 주가 아르헨티나를 등에 업고 독립전쟁을 일으켰으며 이 독립전쟁은 성공해 현재 우루과이가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브라질 해군이 크게 패하며 많은 사상자를 내자 브라질 국민들의 민심은 크게 나빠지고 결국 페드루 1세는 포르투갈로 넘어가버리면서 페드루 2세가 집권을 시작합니다. 페드루 2세는 노예제 완전 폐지를 선언하고 기득권 세력과 대립했는데 이 때문에 쿠데타가 일어나 페드루 2세가 폐위되면서 브라질은 공화국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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